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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암면 사랑방 서안(西安)답사기 2
2012-03-25 06:56:05
최차호(마암면) <> 조회수 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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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안(西安)답사기 2

영원불사를 꿈꾸던 진시황의 아방궁(阿房宮)

 


아방궁 1


서안시 서쪽 교외에 있는 이 유적지는 史記에 의하면 건축물의 규모는 동서 500步 즉 3000尺, 남북 500尺이라 한다. 미터법으로 환산하면 동서 693m, 남북 116.5m의 크기로 앞의 전(殿)과 뒤의 궁(宮), 두 부분으로 나뉘어 있었으며 1만 명을 수용할 수 있었다고 한다. 아방궁의 건설은 한편으로는 황제의 위엄을 보이기 위함이었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더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황제에게 알현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아방궁 2

기록에 의하면, 진시황이 중국을 통일하고 하나의 국가로 정복하는 과정에서 경성(京城-북경), 함양(咸陽-西安)의 궁궐들을 다시 짓게 했는데 이것을 육국궁전(六國宮殿)이라 불렀다. 한번은 진시황이 각지의 12만 영주와 부상(富商)들을 함양으로 모았는데, 함양궁에 숲처럼 빽빽이 들어서서 입구까지 꽉 찼다고 한다.

 


아방궁 3

그런데 이곳은 남쪽으로는 위강(渭江)북쪽으로는 고원을 접하고 있어서 앞으로 넓힐 수가 없었다. 이에 진시황은 위강을 메워 남쪽의 평원까지 확장시켰고 진시황이 중국을 통일한 후 9년(서기 212년)에는 서주(西周)근처에 아방궁의 전전(前殿)을 건설하기 시작했다. 아방(阿房)이라는 것은 근방(近旁)즉 함양의 근처를 의미한다는데 미처 공사가 다 끝나기 전에 진시황이 죽고 그 2세가 이어 공사를 계속하였다고 한다.

 


아방궁 3

전하는 바에 따르면 아방궁의 크고 작은 전우(殿宇)만 700여 곳에 이르고, 같은 하늘 아래에 있다고 해도 각각의 방이 모두 기후가 틀렸다고 한다. 진시황 생전에는 주변의 육국(六國)에서 가져 온 보석과 미녀들을 궁내에 보관해 두었고 매일 돌아가며 하루씩 각각의 방에 머물렀는데, 죽을 때까지도 다 마치지 못했다고 한다.

 


진시황과 아방궁

그러나 이후, 진왕조의 정치제제와 경제가 서서히 붕괴되고 농민봉기가 일어나 항우(項羽)가 병사를 이끌고 함양을 함락시키면서 아방궁도 폐허로 남게 되었다.

경국지색(傾國之色)양귀비(楊貴妃)

 


양귀비


나라를 멸망의 길로 이끈 천하절색 양귀비. 그러나 이에 못지않게 현종 역시 역사상 빠트릴 수 없는 플레이보이였던 것 같다. 며느리를 품안에 넣기 위해 가출시켜 화산(華山)에 있는 도교사원으로 보내 양태진(楊太眞)이란 법명을 만들어 다시 이곳 화청궁에 불러 酒池肉林 속에 묻혀 정사(政事)를 돌보지 않았다.

그것도 모자라 양귀비의 사촌언니인 괴국부인 까지 품안에 넣었다가 결국 양귀비의 질투로 내보냈는데 사가(史家)들은 현종이 왕비인 무혜비를 잃고 외로움을 이기지 못해 양귀비를 품안에 넣었다고 하는데 과연 그것이 옳은 말인지는 사람마다 해석의 차이가 있을 것이다.

沈 魚 落 雁
물고기는 물속으로 가라앉고
기러기는 땅으로 떨어지며

閉 月 羞 花
달은 구름 뒤로 얼굴가리고
꽃은 스스로 부끄러워하네!

서시(西施)가 얼마나 아름다웠으면 서시의 얼굴을 본 물고기가 헤엄칠 생각은 않고 정신을 잃다 물속에 가라앉았으며, 날아가는 기러기가 날갯짓을 멈추다가 땅으로 떨어졌을까! 또한 양귀비는 얼마나 아름다웠으면 달이 구름 뒤로 얼굴을 숨기고 꽃이 부끄러워하였을까?


楊貴妃는 서시, 왕소군, 초선과 더불어 중국 4대미인 중의 한 사람인데 촉(蜀)나라에서 태어나 어렸을 때 부모를 여의고 숙부 양현염(楊玄琰)의 집에서 자랐다고 한다. 그리고 17세 때 현종의 아들 수왕(壽王)의 비(妃)가 되었다. 천하절색인 양귀비(며느리)의 미모에 눈이 먼 현종은 가슴을 앓다 자신의 측근이자 당대 최고의 권력가인 환관 고력사(高力士)에게 이 일을 의논하였다.


화청궁 1

결국 고력사는 양귀비의 두 몸종을 매수하여 그녀들에게 양귀비의 마음을 돌리도록 하였다. 양귀비의 몸종들은 매일같이 양귀비를 설득하였으며, 양귀비도 본래 수왕(壽王)에 대한 사랑보다는 부귀영화에 더 욕심이 있었기 때문에 일단 수왕 곁을 떠나기로 결심하였다. 수왕을 떠난 양귀비는 우선 화산(華山)으로 가서 여도사(女道士) 생활을 하다가 양태진(楊太眞)이란 이름을 얻고 현종의 후궁으로 들어갔다. 이것은 현종의 며느리에서 현종의 귀비(貴妃)로 탈바꿈하기 위한 형식을 거치기 위해서였다.

 

현종은 사람들의 이목을 의식한 나머지 여산기슭에 있는 화청지로 양귀비를 보낸 후 이곳에다 궁궐을 하나 마련해주고 그것을 태진궁(太眞宮)이라 하였으며 이때부터 정사(政事)는 돌보지 않고 양귀비와의 애정행각에 빠졌다. 현종은 양귀비를 즐겁게 해주기 위하여 양씨 일족에게 고관대작의 지위를 주었다. 그 결과 양귀비의 사촌오빠 양국충(楊國忠)은 전횡을 하였는데 이는 곧 중국 역대왕조의 전형적인 외척의 시대가 된 것이다.

 

벽면에 새겨진 미녀들

양국충(楊國忠)은 스스로 이름을 드높이기 위해 원정을 일삼는 등 악정을 펼쳤기 때문에 국력을 소모시켜 민중으로부터 원한을 사게 되었다.
더욱 楊國忠은 권력다툼에서 라이벌인 절도사 안록산(安祿山)을 축출하기 위해 현종에게 간언을 하였다. 결과적으로 이에 위기감을 느낀 안록산은 반란을 일으키게 되었다.

난을 피하기 위해 장안에서 도망하여 촉으로 향하던 현종과 양귀비 일행이 마외(馬嵬:섬서성 흥평시)에 다다르자 楊國忠에게 원한을 품고 있던 병사들은 그의 부대를 포위하여 살해하였다. 더욱 병사들은 현종에게 양귀비를 살해할 것을 요구하였기 때문에 현종은 어쩔 수 없이 양귀비가 목을 매달아 죽도록 하였다. 이때 양귀비의 나이 38세였다고 한다.

화청지(華淸池)


화청궁 2

華淸池는 서안에서 25㎞정도 떨어진 여산(驪山)산자락에 있는 온천이다.
역대 제왕이 행궁별장을 세워 휴양했던 곳이며 당나라 말엽 양귀비와 현종이 사랑을 나누었던 곳으로 유명하다. 전해지는 바에 의하면 西周시대에 이곳에 驪宮을 세웠으며, 진(秦)대에는 이곳에 石宇, 당나라 현종시대에는 이곳을 더욱 크게 넓혔고 이름을 "화청궁"이라 고쳤다. 또한 이곳이 온천위에 세워졌으므로 "화청지"라고도 불렸다.


대리석 욕조


이곳 화청지의 물속에서 반쯤 드러난 양귀비의 아름다운 육체를 본 67세의 현종은 결국 감정을 억제하지 못하고 26세의 양귀비를 품에 안음으로써 대당제국의 멸망을 초래하였다. 현종은 자기의 품으로 돌아온 양귀비로 인하여 이림보(李林甫)와 양국충의 전횡으로 '천보대란(天寶大亂)'을 맞이하였다. '천보대란'이란 바로 당나라를 쇠망의 길로 이끌고 양귀비를 죽음의 길로 데려간 '안록산의 난'을 말한다.

영주(營州)유역(柳域)의 호인(胡人)출신인 안록산은 처음에는 변방의 일개 군졸에 불과했으나, 후에는 세 지역을 다스리는 절도사로 승승장구하면서 막강한 권세를 휘두르게 되었다. 안록산이 이렇게 세력을 얻게 된 것은 순전히 양귀비 때문이었다. 천보 6년(747) 정월 현종은 변방의 절도사 안록산을 환영하는 연회를 흥경궁(興慶宮)에서 열었는데, 이 자리에서 안록산과 양귀비의 첫 만남이 이루어졌다.

현종은 양귀비를 양귀비는 양국충과 안록산을 다시 말해 자신이 잡아먹힐 호랑이를 제 각기 키운 것이다. 그 후 안록산은 자유롭게 궁궐을 출입할 수 있게 되었고, 양귀비는 그를 수양아들로 삼았다. 40대 후반의 아들(안록산)을 둔 20대의 젊은 엄마가 된 그들은 점차 자신들을 죽음으로 몰고 갈 변태행각을 했던 것이다.

 


화청궁 3

한번은 안록산이 양귀비를 품에 안고 그녀의 신체 중 가장 부드러운 부위를 힘껏 비비자 뜻밖에 그녀의 젖가슴에 상처가 나게 되었다. 결국 현종에게 들통이 나지 않기 위해 붉은 비단 천으로 가슴을 가릴 수밖에 없었다. 그것을 중국어로는 "허즈(?子)" 또는 "뚜떠우(?兜)"라고 하는데, 이것이 바로 '브래지어의 시초'라고 한다.

중국 역대 왕조의 멸망원인을 보면 외척과 환관의 대립이 계속되다가 결국은 민중봉기를 유발하여 멸망한다. 즉 외척이 득세하면 왕은 애욕에 빠지거나 무능하게 되고 이를 혁파하기 위하여 친정(親政)체제를 강화하는데 이들의 주역은 환관이 떠맡는다. 그러나 이들 환관정치(친정체제)도 오래가지 못하고 권력다툼에 휩싸이면서 다시 외척과 격렬한 투쟁을 하게 된다.
이로 인한 가장 큰 피해자는 백성이다. 급기야는 농민봉기를 자초하게 된다.
당나라 역시 이와 같은 과정에서 예외가 될 수 없어 현종도 양귀비 즉 양(楊)씨 일족으로 인하여 멸망의 길로 치닫게 되었다.

**** 다음 편에 계속 ****  /2007-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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