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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암면 사랑방 서안(西安)답사기 3
2012-03-25 06:59:26
최차호(마암면) <> 조회수 660
58.238.214.20

서안(西安)답사기 3

 


황릉 입구


진시황릉(秦始皇陵)

중국 최초의 황제. 진나라 시황제의 능묘이다. 섬서성 임동현에서 5km동쪽으로 떨어진 곳에 있다. 사기(史記)에는 기원전 246년에 즉위 하자마자 여산기슭에 능묘를 구축하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기원전 221년 진나라는 천하를 통일한 후 각지에서 동원한 죄수 70만 명으로 능묘를 건설하였다고 한다.


봉토 정상에서


축조에는 36년이나 계속되었다. 내부에는 호화의 극치를 이루고 진귀한 보물을 가득 채웠다. 기원전 209년 진시황은 이곳에 묻혔다. 현재 진시황릉은 석류나무가 빽빽하게 심어져 있고 두 줄로 자작나무가 능을 지키는 것처럼 늘어서 있으며, 능묘의 정상까지는 돌계단으로 이루어져 있다.


박물관 앞에서


병마용갱(兵馬俑坑)

병마용갱에 들어서는 순간 나는 아! 이것을 만들기 위해 쏟은 피와 땀은 이 공간을 메우고도 남을 것이다. 탄로될 것을 두려워하여 공사에 동원되었던 모든 사람을 생매장시키고 도굴을 방지하기 위하여 석궁(石弓)을 설치하고 수은으로 강을 만들었다고 하는데 과연 그럴 만도 했겠다. 라는 생각이 들었다.

 

병마용갱 내부 1


그리고는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상상을 해 보았다. 이 공사를 독려하면서 아니! 중노동에 지친 인부들을 채찍으로 내리치면서 요×들아! 비록 지금의 너희들은 불과 몇 십 년 동안 고생하지만 이것이 완성되면 천 년이나 아니! 몇 천 년 후의 후손들은 이로 인하여 달러박스에 앉을 것이다.


병마용갱 내부 2


어찌! 뱁새(참새)가 봉황의 뜻을 알 것이냐? 죽지 않으려거든 일이나 부지런히 해! 라고 호통했을 것이다. 역설적이지만 사실은 그렇다. 지금 이 병마용갱으로 벌어들이는 달러는 몇 백 년 아니! 몇 천 년이고 달러를 벌어들여 후손들에게 먹고 살 수 있도록 남겨진 유산이다. 지적소유권(知的所有權)도 표절시비도 없다. 그저 관리만 잘 하면 천 년이고 만 년이고 소리 없이 돈을 벌어 주는 자산이 된 것이다.


병마용갱 내부 3


병마용갱은 진시황릉의 동쪽 1.5km 지점에 있고 1974년 농민이 우물을 파다 우연히 발견한 것이다. 용갱은 전부 3개인데 그 중 1호 갱의 면적은 1426㎡이고 그 중에 실물크기의 도용(陶俑)과 도마(陶馬)약 6000개가 묻혀있는데 지금까지 무사용(武士俑)1000여개, 전차(戰車)8兩 도마(陶馬)32匹이 출토되었다.

 

병마용갱 내부 4

2호 갱의 면적은 약 6000㎡ 도용과 병마는 모두 약 1300여개 이며 그 외 전차가 89량 보병, 기병, 전차 등이 혼합되어 편성된 곡진(曲陣)으로 내용은 1호 갱보다 더욱 많아 秦나라 俑의 정수를 볼 수 있다. 3호 坑은 면적 376.64㎡, 지하의 대군을 통수하는 지휘부로 무사용(武士俑) 68개 전차1량 도마(陶馬)4匹이다.


병마용갱 내부 5

진시황제는 기원전 246년 열세 살 소년으로 진(秦)나라 왕위에 올랐다. 그는 스물세 살 때 실권을 잡고 기원전 230년부터 군사를 일으켜 이웃 나라들을 정복했다.10년도 못돼 중국 대륙을 최초로 통일한 그는 전설에 나오는 3황5제를 모두 겸했다는 뜻으로 스스로를 황제라 일컬었다.


병마용갱 내부 6

진시황은 대륙을 통일하자 왕이나 제후가 다스리던 봉건제 정치를 황제가 직접 다스리는 중앙집권제로 바꿨다.그는 넓은 영토와 여러 민족을 다스리기 위해 철권통치를 일삼았다.그리고 백성의 무기를 모두 빼앗았으며, 지방 세력가의 성을 모조리 깨뜨리고 그들의 가족 12만 명을 수도에 데려다 볼모로 삼았다. 또 봉건제도를 뒷받침해온 유교 철학을 없애려고 유학 책을 불태우고(焚書坑儒)유학자 460명을 산 채로 땅에 파묻었다.


병마용갱 내부 7


진시황은 이처럼 전제 군주로 악명이 높지만 치적도 눈부시다. 성문법을 만들고 도량형 표준을 정했으며 금화와 동전의 무게를 일정하게 해 화폐를 통일했다. 또 글자를 간단하게 만들어 통일함으로써 넓은 중국 땅 어디에서나 뜻이 통하게 했다.


等身大 武士俑

그는 또한 식량과 물자를 나르기 위해 수도 함양을 중심으로 거미줄같이 퍼져나간 ‘황제 도로’를 닦았고 마차 크기를 통일해 새 길에 맞추었다. 땅을 파고 물을 끌어 운하도 만들었는데, 이 가운데 몇몇은 지금도 잘 쓰이고 있다. 특히 중국 대륙의 남과 북을 잇는 운하는 오늘날에도 요긴한 교통망이다. 중국 역사상 저수지를 처음 만든 사람도 진시황이다.

**** 다음 편에 계속 ****  /2007-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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